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베리아 반도 전쟁 (문단 편집) === 전개 === 1807년 11월 19일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국경에 있는 도시 알칸타라를 출발한 쥐노의 군대는 11월 30일 리스본에 입성했다. 포르투갈은 영국의 포르투갈 진공만을 고려해 군대가 항구쪽에 있었던 탓에 나폴레옹군은 손쉽게 별다른 저항없이 리스본을 [[함락]]했다. 그러나 포르투갈 여왕 [[마리아 1세]]와 섭정 [[주앙 6세]][* 남편인 [[페드루 3세]]와 차기 왕위계승자였던 장남을 잃고 정신병이 심해져 도저히 국정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차남인 주앙이 섭정을 맡았다.]를 비롯한 요인들이 [[브라질]]로 도망치는 바람에(...) 포르투갈은 해외 식민지를 유지할 수 있었고(그리고 브라질은 사실상 본국이 되었다.) 이는 나폴레옹에겐 타격으로 다가왔다. 뿐만 아니라 포르투갈군의 저항은 미미했지만, 열악한 도로와 이베리아반도의 악몽 같은 지형이 프랑스군을 철저하게 괴롭혔다. 뿐만 아니라 전쟁 초기 이베리아반도에 배치된 프랑스군은 대부분 신병이었으며, 현지조달에 상당부분 의지하던 당시의 군대에게 가난한 이베리아 마을은 최악의 환경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환경은 풍요로운 프랑스 출신 신병들이 버티기엔 너무나 열악했고, 리스본에 입성하던 날 쥐노의 휘하에는 고작 2천여 명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나머지 낙오병들은 그냥 행군로에 주저 앉아 있었다. 더군다나 영국의 함선을 타고 브라질로 튀어버린 왕실은 착실하게 포르투갈의 금고를 챙겨갔고 쥐노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어찌됐든 포르투갈 본국과 영국의 무역을 차단하는 것에는 성공할 수 있었다. 이 때 스페인 내부의 상황이 변수로 작용했다. 스페인은 프랑스와의 동맹으로서 수행한 전쟁으로 인해 지속적으로 영국에게 당했고, 이는 식민제국이었던 스페인에게 치명적이었다. 더군다나 스페인의 의견은 프랑스에게 번번이 묵살 당했고 이 때문에 프랑스와 스페인 사이가 소원해지기 시작한다. 자꾸만 전쟁에서 발을 빼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스페인을 시험하기 위해서 나폴레옹은 발틱 해안의 베르나도트 군단을 지원하기 위해 스페인군의 주력이었던 [[로마나 후작]]의 군대를 요구했고 스페인이 이를 받아들여 파병하며 스페인은 무주공산이 된다. 스페인은 정치적으로도 매우 혼란스러웠는데 이 혼란이 나폴레옹 몰락의 시발점이 된다. 당시 국왕이었던 [[카를로스 4세]]는 계몽군주였던 선왕 [[카를로스 3세]]에 비해 능력과 카리스마가 매우 떨어지는 모습을 보였고, 정치에 무관심했다. 이 때문에 왕비였던 [[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 카를로스 4세와 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의 딸도 스페인의 마리아 루이사이다.]와 그녀의 애인이었던 마누엘 데 고도이에게 매우 휘둘렸다. 고도이는 부패한 인물로 개인의 권력강화와 부를 축적하기 위해 수많은 부정행위를 저질렀고, 이 때문에 민중에게 미움을 사고 있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것이 [[페르난도 7세|페르난도 왕태자]]였다. 두 세력 간의 대립은 나폴레옹에게 내정 간섭의 빌미를 주었고, 스페인에 파견된 프랑스의 첩자들은 혼란을 더욱 부추겼다. 1807년 10월 29일 고도이가 페르난도를 국왕 폐위 모의 및 왕비 살해 혐의로 공격하며[* 이 사건은 에스코리알 음모 사건으로 알려져 있으며 페르난도 왕태자는 재빨리 자신을 도와줬던 동료들의 이름을 불며 목숨을 건졌다. 당시 왕태자는 자신이 자유주의적 헌법을 약속하며 왕위에 오른다면 프랑스에서도 도와줄 것으로 여겼지만 이때 이미 스페인의 직접 통치를 염두에 두고 있던 나폴레옹은 왕태자에게 관심이 없었고 왕태자의 정변은 실패로 돌아갔다.] 정치적 혼란은 첨예해졌다. 그와중에 12월 17일 영국과 해상에서 통상하는 상선의 나포를 허가한 밀라노 칙령이 발표됐는데, 스페인 해안은 영국과의 밀무역의 천국이었고, 지방관들은 이를 용인했다. 파리에서는 이를 이미 알고 있었고, 포르투갈 점령의 강화, 내정 질서 회복과 왕실 간의 대립 중재를 명분으로 군대를 파견하여 북부 스페인 도시들을 점거하고 12만에 가까운 군대를 뮈라 원수에게 주어 스페인에 진주 시켰다. 그들은 초기에는 혁명의 군대, 자유의 군대로 여겨져 민중에게 따뜻한 환대를 받았으나 크나큰 짧은 단꿈에 불과했다. 프랑스군이 마드리드로 향하자 불안해진 국왕 부처와 고도이는 아랑후에스라는 작은 도시로 몸을 피했는데 이것이 호시탐탐 기회만 옅보던 왕태자에게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왕실 근위대를 앞세워 민중들을 선동한 왕태자는 쿠데타를 일으켰고 고도이의 궁전을 점령, 약탈했으며 이때 민중들은 고도이를 죽기 전까지 패줬다. 정변으로 입지가 크게 약해진 [[카를로스 4세]]는 사흘 뒤 폐위되었고, 왕태자가 [[페르난도 7세]]로 즉위했다. 이후 왕가는 마드리드로 돌아왔지만 3월 24일 뮈라가 마드리드에 입성했다. 이 때 나폴레옹은 왕실의 분란을 중재한다는 명복으로 스페인 왕실 가족들을 스페인과 프랑스 국경 근처에 있는 바욘으로 소환했고, 이로 인해 반프랑스 폭동이 발생했다. [[페르난도 7세]]는 이러한 주변 상황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을 만나기 위해 떠났다. 중재회의는 5월 10일에 시작되었는데, 나폴레옹은 [[카를로스 4세]]와 [[페르난도 7세]]가 스스로 왕위를 포기하게 만들고 독단적으로 자신의 형 [[호세 1세|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왕으로 옹립했다. 마드리드도 아닌 바욘에서 대관식을 치른 조제프는 [[호세 1세]]가 되어 7월 20일 마드리드에 입성했다. 카를로스 4세는 로마로 쫓겨났으며, 페르난도는 프랑스 중부의 도시 발랑세에서 대프랑스 동맹군이 파리를 점령할 때까지 연금 당하는 신세가 된다. 이러한 나폴레옹의 독단적인 결정에 스페인 민중들은 분노했다. 한편 마드리드에서는 카를로스 4세의 막내아들 돈 프란시스코 파울로 왕자를 뮈라가 프랑스로 압송하려 했다. 마드리드 시의 위원회는 이를 거부했으나 페르난도 7세가 친서를 보내며 결국 왕자를 보내게 되었는데, 1808년 5월 2일 마드리드의 왕궁 정원으로 시민들이 모여 왕자의 압송을 저지하려했다. 이때 뮈라 원수는 [[프랑스 제국 근위대]]의 척탄병 대대와 포병대를 동원하여 군중을 해산하려 하였고, 맘대로 되지 않자 군중을 향해 포격을 가했다(나폴레옹 본인도 파리의 시위대를 대포로 날려버리며 집권한 인물답게, 프랑스의 시위진압 수단은 대포였다). 포격으로 인해 분노한 시민들은 봉기했고 마드리드 시민들은 무기를 들고 나와 닥치는대로 프랑스 군을 공격했고 130 명의 프랑스 군이 목숨을 잃었다. 마드리드에 있던 일부 스페인군 또한 민중의 편에서 프랑스군을 공격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반격은 매우 체계적이었다. 이들은 이미 프랑스에서 여러번의 민중반란을 진압한 경험이 있었고, 이를 토대로 착실하고 잔혹하게 진압해나갔다. 도시 계엄령을 선포하고, 행정망을 장악했으며 이를 통해 도시의 통치권을 장악했다. 같은 날 저녁 뮈라는 무기를 가진 사람은 곧바로 처형할 수 있다는 법령을 발표하고 무기의 자진 반납을 촉구했다. 모든 모임 또한 금지하였다. 이로써 마드리드에서의 봉기는 순식간에 진압되었다. 이튿날 마드리드의 교외에서는 시위에 참가했던 수백 명의 사람들이 총살 당했다.[* Dos de Mayo라고 불리는 이 봉기를 기념하기 위해 현재도 5월 2일은 마드리드 지역의 공휴일이 되었다.][*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의 “1808년 5월 3일”은 이 학살을 배경으로 한다.] 마드리드에서의 봉기는 빠르게 진압되었지만 5월 10일 있을 왕실 조정회의에 앞서 친프랑스 세력들이 나폴레옹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왕으로 세워달라는 요청을 했다는 소문이 전국에 퍼지며 5월 9일 아스트리아스 주에서의 반란을 시작으로 곳곳에서 거병이 시작되었다. 각지의 훈타(Junta)[* 위원회라는 뜻으로 프랑스에 의해 해체된 행정기구를 대체하는 지방 자치적인 통치 기구이다.]를 중심으로 저항운동이 빠르게 번졌다. 각지의 훈타들은 공동의 목표와 하나의 명령체계를 갖추지 못했지만 페르난도 7세를 순교자로 여기며 감정적인 호소로 빠르게 커져갔고, 대규모 군대들이 생겨났다. 안달루시아에서만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카스타뇨스 장군 휘하에 3만명의 병력이 구성된 것이 그 예였다. 이러한 세력이 빠르게 성장하는 데는 크게 두가지 요인이 더해졌는데, 첫번째는 프랑스의 보급체제였다. 나폴레옹이 보급에 신경을 썼다고는 하지만 당시의 군대는 기본적으로 현지조달에 의존했다. 게다가 나폴레옹은 기동전을 좋아했고, 그를 위해 병사들의 짐을 가볍게 하고 그만큼 더 적극적으로 현지조달(약탈)을 했다. 예를 들면 텐트를 가져가는 대신 민가의 집주인을 내쫓고 자는 식이다. 문제는 프랑스군은 대부분 중서부 유럽에서 전투를 치뤘고 중서부의 유럽은(북이탈리아 등) 어느곳보다 풍요로운 곳이었기에 어느정도 현지조달이 이루어져도 충분한 곳이었다. 그러나 이베리아반도는 중부 유럽과 사뭇 달랐다. 이베리아의 농토는 중서부 유럽에 비해 척박했고, 스페인의 경제는 식민지에 의존하여 제대로된 산업이 없어진지 오래였다. 게다가 민중의 삶은 피폐한 상황에서 프랑스와의 동맹으로 영국의 견제를 받아 식민지와의 연결이 끊어져 경제가 나락으로 떨어졌다. 고도이를 중심으로 하는 정부는 부패하여 민중을 수탈하는데 힘썼기 때문에 당시 이베리아의 민중들은 뭘 털어가려해도 털어갈 것이 없는 상황이었지만 프랑스군도 마찬가지로 현지조달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보급품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약탈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뺏기면 굶어죽는 민중과 안 뺏으면 굶어죽는 외국군 간의 갈등은 결국 최악으로 치달았고 이는 민중들의 반프랑스 봉기로 이어졌다. 두번째 요인은 영국의 지원이었다. 훈타의 대표로 파견된 토레뇨 공작의 사절단은 런던에 도착해 6월 8일 영국의 외상 조지 캐닝의 무기, 탄약, 자금의 지원을 이끌어냈다. 이에 반프랑스군에 입대하면 프랑스군에게 빼앗기는 상황보다는 훨씬 나은 삶이 보장됐기 때문에 반프랑스군은 빠르게 늘어갔다. 이런 와중에 6월 14일 아서 웰즐리 경이 약 1만의 원정군 지휘관으로 임명 되며 본격적인 반도 전쟁의 막이 올랐다. 이런 가운데 포르투갈에서도 나폴레옹에 맞선 반란이 일어났고 1808년 7월 19일, 안달루시아의 바일렌(Bailen)에서 듀퐁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스페인군에게 격파당하면서[* 이 전투는 전리품 약탈에 눈이 먼 군대는 민병대에게도 처절하게 털릴 수 있다는 극명한 사례로도 유명하다. 듀퐁과 그 부하들과 병사들은 전리품을 지키느라 제대로 맞서 싸우지 못했으며, 항복하는 순간까지도 전리품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했다고. 심지어는 소지하던 병장기를 포기하고서라도 어떻게든 금은보화만큼은 본국으로 바리바리 싸가지고 가려고 했다고 한다(...). 사실 월급 100~200만원 받고 전쟁터를 굴러야 하는 병사 입장에서 10억짜리 금덩이를 지나치는 건 불가능하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프랑스군은 점점 불리해졌다. 결국 스페인군은 8월 마드리드에 입성해 호세 1세를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호세 1세는 나폴레옹에게 ''''이베리아를 점령하려면 20만 이상의 병력이 필요하고 내 권위를 세우려고 하면 [[단두대]]만 1만 개 쯤 필요할 것 같다. 너는 집집마다 요새화되고 사람들은 쉽게 단결하는 여기 상황을 몰라. 우리가 정복자 행세하는 한 여긴 꿈도 희망도 없어.''''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을 정도.[* 실제로 이베리아 반도 전쟁이 본격화된 1809년부터 1813년 4월까지 프랑스는 '''상시로 최소 20만명 이상'''을 이베리아 전선에 주둔시켜야 했다. 러시아 원정으로 병력을 빼갈 때에도 최소 20만은 남겨두었다.] 특히나 나폴레옹에게 타격이었던 것은 포르투갈과 스페인에서 일어난 반나폴레옹 반란이 귀족이나 군인들이 주도했던 게 아니라 일반 민중들이 주도했다는 점이었다. 영국은 이에 주목했고 나폴레옹을 이길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가진 영국은 포르투갈에 상륙해 나폴레옹을 격파하려는 전략을 세우게 된다. 성난 민중들은 게릴라가 되어 활약했고, 일부 게릴라는 정규군에 준하는 전력으로 프랑스군을 끝없이 괴롭혔다. 영국-스페인-포르투갈 연합군이 프랑스에 비해 정찰과 정보력에서 항상 앞섰던 것은 게릴라들의 정보자산 덕분이었다. 이 시점에서 이베리아 프랑스군의 주력이 에브로 강 건너편으로 퇴각함에 따라 쥐노는 포르투갈에 고립되어 있었다. 1808년 8월, [[아서 웰즐리]]가 이끄는 [[영국군]]은 포르투갈에 상륙해 8월 17일, 로리사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했다. 이후 8월 21일에는 영국, 포르투갈 연합군이 비메이로에서 다시 프랑스군을 격파했고 연전연승하던 나폴레옹군의 기세가 꺾이자 영국은 환호했다. 그러나 영국군은 잘 지휘하던 웰링턴이 너무 젊다는 이유로 포르투갈에 보내는 추가 병력을 잘 지휘할 수 없겠다고 판단해 해리 밸러드가 원정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결국 프랑스는 포르투갈에서 불리해지게 되어 신트라에서 협정을 맺고 포르투갈에서 프랑스군은 철수한다. 그러나 앙도슈 쥐노가 고립되었던 데다 절망적인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프랑스군 전부와 무기, 전리품을 영국 선박으로 프랑스까지 안전하게 이송한다''''는 내용의 신트라 협정을 맺은 휴 달림플, 해리 버라드 등 장성 3명에 대한 진상 조사가 이루어졌다. 아서 웰즐리는 이 협상과 무관하다고 판단되어 진상조사 대상에서 벗어났으나 귀국조치 되었고, 한동안 지휘관이 아니라 아일랜드 수상으로 있게 되었다. 이후로 포르투갈의 영국군 3만 명은 존 무어 경이 지휘하게 되었다. 영국-스페인-포르투갈 연합군은 프랑스의 코앞인 바스크까지 진군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나폴레옹은 직접 친정을 결심하게 된다. 무려 12만 5천 명[* 계속 증강되어 1810년에는 32만 5천 명까지 증가하지만 이후 프랑스의 전황이 나빠지는데다 러시아 원정에 대규모 병력을 투입해야 하면서 줄어든다.]에 달하는 병력을 이끌고 이베리아 반도로 진군한 나폴레옹은 부르고스에서 영국군과 전투를 벌였다. 부르고스 방면으로 진군중이던 존 무어 경의 영국군은 나폴레옹에게 패하였고 결국 이듬해 1월 코루나에서 철수하게 된다. 이 때 존 무어 경이 전사하지만 영국군은 붕괴하지 않고 전력을 유지하면서 퇴각할 수 있었다. 나폴레옹의 친정으로 전세는 역전되어 프랑스군은 그해 12월 마드리드를 탈환했으며, 스페인 임시정부는 세비야까지 밀려나게 되었다. 나폴레옹은 원수들에게 전쟁을 맡긴 뒤, 자신은 귀국했다. 그러나 존 무어 경의 군사행동은 스페인군에 집중되던 나폴레옹의 시선을 분산시켜 스페인군에게 회복할 시간을 벌어주었고 이후 아서 웰즐리의 작전에 영향을 준다. 1809년, 프랑스군은 포르투갈 재침공 작전을 감행했다.(바스크까지 밀려났다가 다시 포르투갈까지 밀어붙인 셈이다) 일부는 포르투갈의 [[민병대]]에게 격파당하기도 했으나 3월 29일, [[포르투]]를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되려 프랑스군은 포르투갈 각처의 저항으로 포르투에 고립되는 형국이 돼버렸다. 그런 가운데 1809년 4월, 영국군의 웰링턴이 돌아와 포르투를 재탈환했다. 이후 웰링턴은 스페인으로 진군해 호세 1세가 이끄는 스페인군을 격파했다. 하지만 스페인군과의 공조가 잘 진행되지 않았고[* 식량 지원을 약속해놓고 잠수 탄다든지, 영국군 보급대열을 약탈한다든지 하며 오히려 방해가 되었다고 한다. 당연하지만 영국군도 현지 약탈을 안 한건 아니었다.] [[앙드레 마세나]]가 지휘하는 프랑스군의 포르투갈 재침이 확실시되는 상황에서 포르투갈의 방비를 위해 웰링턴은 결국 결단을 내렸다. 이른바 "토레스 베드라스 전선"을 구축해 나폴레옹군의 진군을 막은 것이다. 토헤스 베드라스torres vedras 방어선은 흉벽과 요새, 강화진지들로 이뤄진, 전근대판 마지노선이었다. 영국의 건축공학과 쇼미더머니, (프랑스군의 약탈로 근로의욕이 상승한) 포르투갈 노무자들이 합쳐진 3중 방어선은 통곡의 벽 그 자체였다. 어느정도냐면, 마세나 원수가 한번 보고 아예 접근 자체를 포기해버릴 정도. 3중 방어선을 건설했는데 1차 방어선조차 건드리지도 않았다. 프랑스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여러차례 포르투갈, 스페인, 영국군과 전투를 치렀다. 하지만 결정적인 승리를 가져오지는 못했고 전쟁은 갈수록 지리한 장기전의 양상을 띄게 되었다. 이러면서 프랑스는 점점 병력과 물자가 부족해져갔다. 해상보급 받는 우주방어선 탓에 프랑스의 장기인 기동전은 불가능한데, 그 상황에서 스페인 전역에서 게릴라전을 치러야 하니 당연한 노릇. 설상가상으로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길에 나서면서 그나마 부족한 병력을 차출당하기(...)까지 했다. 포르투갈을 굳게 지키고 있던 웰링턴은 1812년, 스페인으로 진군하여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Salamanca|살라망카 전투]]에서 마르몽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고[* 마르몽은 웰링턴이 신중한 장군이라 수비를 할 것이라 착각하고 측면 공격을 시도했지만, 웰링턴은 언덕 너머에 영국군 3사단과 포르투갈 기병대를 숨겨두었고, 이들을 돌격시켜 프랑스군을 기습 후 와해시키는 공격적인 전술을 사용했다.], 프랑스군은 안달루시아를 포기하게 되었다. 그리고 프랑스군이 러시아 원정으로 이베리아 전선의 병력 상당수를 차출했다는 것을 알게된 후, 웰링턴은 이듬해인 1813년 6월 21일,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Vitoria|비토리아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해 이베리아 반도에서 완전히 프랑스군을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웰링턴은 프랑스군의 측면을 위협하는 기동으로 호세 1세를 비토리아까지 후퇴시켰다. 스페인 북부의 항구도시들을 탈환하여 보급선을 줄인 것은 덤.[* 원래는 리스본을 통해서 해상보급을 받았기에 비토리아 전투 시점에서는 보급선이 길어졌어야 했지만, 북부의 항구도시를 통해 보급선을 크게 줄였다.] 그리고 비토리아 전투에서 원래는 사라고사에서 프랑스군의 증원이 오기로 했는데 웰링턴은 이 때 연합군의 장점인 (게릴라들이 수집한) 정찰 자산을 이용해 사라고사의 증원이 22일에서야 도착한다는 것을 듣고 21일에 선제 공격을 감행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웰링턴은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에 실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피레네 산맥을 넘어서 프랑스 남부 본토까지 쳐들어갔다. 결과적으로 이베리아 반도에서 발목이 잡힌 나폴레옹은 이후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나 이 전쟁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큰 타격을 남겼다. 두 나라 모두 본토가 나폴레옹에 유린당하는 비극을 겪었는데, 스페인의 라틴아메리카 식민지 [[크리오요]] 계층은 이를 보고 "참견 많은 본국이 호구인 게 입증되었으니 독립하자"라는 여론이 들끓어[* 실제로 반도 전쟁이 [[1808년]] [[5월]]에 발발하고 '''불과 4달 뒤'''인 9월부터 [[스페인령 아메리카 독립 전쟁|스페인령 아메리카 지역에서 차례차례 들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결국 1820년대에 [[쿠바 도독령|쿠바]]와 [[푸에르토리코]]를 제외한 모든 라틴아메리카 식민지를 내줘야 했고(영국과 미국이 남미의 독립을 지원했다)[* 왜냐하면 전통적으로 영국은 스페인을 적대국으로 여겼고, 행여나 나폴레옹을 몰아낸 스페인이 중남미의 방대한 식민지들을 토대로 다시 강대국이 될 것을 우려하여 스페인의 중남미 식민지에 영국군 장교들을 보내 식민지 반군을 훈련시키거나 아예 그들과 합류하여 직접 스페인군에 맞서 싸우는 식으로 스페인을 괴롭혔다. 이 사실을 안 스페인 정부가 영국 정부에 강력히 항의했지만, 영국 정부는 모르는 일이라며 오리발을 내밀었다.], 포르투갈은 아예 왕가가 [[브라질]]로 피난한 탓에 본국보다 몇 배나 큰 브라질 식민지의 입지가 너무나도 커져, 다시 포르투갈이 제대로 브라질을 통제하려 하자 왕태자 [[페드루 4세]]를 내세워 [[브라질 제국]]으로 독립해 버렸다. 포르투갈은 프랑스의 약탈, 영국의 약탈(...), 게릴라의 약탈(...), 영국의 청야작전(...) 등이 겹치며 인구 3%가 사망했다(6.25전쟁기 남한 사상자가 2.5%인걸 감안하면 얼마나 큰 피해인지 감이 올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